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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 때 신하들은 어떻게 타이밍을 맞춰서 합창했을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를 왕조시대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시대를 경험할 수 없으나 기록으로 남은 자료들을 통해 간접 체험을 할 수 있고,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드라마나 영화 등의 창작물이 만들어지기도 하므로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드라마나 영화 등의 창작물을 통해 그 시대를 엿볼 때 주제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임금과 신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정사(政事, 나라를 다스리는 일)를 처리하는 장면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임금의 말에 따라서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라고 합창합니다. 어떻게 신하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토씨 하나까지 똑같은 것이고, 정확한 타이밍에 합창할 수 있는 걸까요?

결론을 말해보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의 연대기자료를 살펴봤을 때 사극에서처럼 신하들이 대화의 말미에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통촉(洞燭)은 밝게 비추다는 뜻이 있고,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상세한 고찰을 요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실록에서 용법을 찾아보면 “임금께서 이미 통촉하셨는데” 또는 “임금께서 통촉하셔서” 등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이는 왕이 해당 사실을 이미 알고 있거나 해당 업무를 처리했다는 뜻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왕과 신하들이 함께 정사를 처리할 때 갑작스럽게 입을 모아 합창하듯 반발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수령(군수·시장)이나 관찰사(도지사)에게 보내는 문서에서는 종종 말미에 ‘통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극에 반영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음으로 성은(聖恩)은 임금의 은혜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보통 임금의 처분이나 감정을 칭하는 높임말로 쓰이고, 망극은 한도가 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는 대상의 크기나 막대함을 과장하는 표현으로 극진히 예의를 갖춰 감사함을 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실록에서 “전하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서..”나 “성은이 망극하다” 등으로 자주 쓰였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을 사극에서처럼 발언의 말미에 쓰인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대기 자료를 살펴봤을 때 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처리하는 방식은 신하가 상소를 보고하거나 신하 또는 왕이 제안할 때 논의가 시작됩니다. 제안은 왕이 먼저 하는 편이고, 이에 신하들이 의견을 개진하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논박하고, 중간중간 임금도 참여합니다.

이후 최종적으로 임금이 판단을 내리고, 사안이 복잡하거나 논의가 충분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언급하거나 신하들끼리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여 추후 결정하는 식으로 운영됐습니다.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됐기에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왕이 결정을 내렸는데, 신하들이 감히 왕의 결정에 동의 또는 반대하는 것이 시대 상황에 어울리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반대를 하는 상황이었다면 이유를 함께 언급했어야 그나마 괜찮겠으나 이유도 말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사극에서는 왜 이러한 표현을 썼을까요? 사극의 극적 긴장감을 높이고, 대화체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각색했다는 것을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알아본 시스템대로 정사를 처리하고, 왕이 “그렇게 한다”고 결정했을 때 논의가 그대로 끝나버리면 당연히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그나마 연대기 자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통촉”과 “성은”, “망극” 등의 표현을 활용해서 의견을 논박하는 장면을 연출한다면 흥미진진하게 연출할 수 있고, 실제 이러한 장면에서 재밌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왕조시대를 배경으로 제작한 옛날 영화를 보면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1961년에 개봉한 [연산군 : 장한사모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폐비 윤씨의 추존(죽은 이의 지위를 높여주는 일)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때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꾸벅거리기만 합니다.

또한, 1962년에 개봉한 [폭군연산(복수,쾌거편)]이라는 영화를 보면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대사가 들어갈 만한 장면이 두 곳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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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신하들에게 퇴정 명령을 할 때와 중종이 등극하고 명령을 내릴 때로 1962년에 개봉한 이 영화 속 신하들은 그냥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실제 영화를 보면 상황이 그렇게 극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들 영화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대사를 사극에 도입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당시 왕과 신하들의 어전회의(御前會議)는 현대의 국무회의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국무회의에서도 의장(대통령)이나 부의장(국무총리)이 결정사항을 확인하고 의사봉을 두드린 다음에 논의가 종결됩니다. 이때 국무위원들은 별말을 하지 않습니다. 왕조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투고 :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김한빛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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