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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위조 화폐가 있었을까?

* 이 콘텐츠는 한국사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화폐 관련 최신 논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교과서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립니다.

화폐는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매개물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국가마다 그 가치를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화폐를 사용하고 있는데, 아주 먼 옛날에는 소금이나 쌀, 가축 등을 이용해 물물교환하는 형태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시대 때도 비슷합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은병이나 쌀, 옷감, 종이돈 등을 사용했는데, 이때 몽골에서 발행한 종이돈이 한반도에서까지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 몽골은 이미 명나라에 밀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후퇴하면서 몽골 종이돈 또는 몽골 보초의 공신력은 크게 약화됐고,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조선은 자체적으로 종이돈과 동전을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종이돈은 조선 정부 스스로 공신력을 가질 만큼 강력한 화폐정책을 펼 수 없어서 실패했고, 동전은 대량의 동이 필요했는데, 일본에서 거의 전량 수입하고 있어서 대량발행이 어려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은을 화폐로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집을 구매하는 등 고액 거래에서나 활용되거나 국제무역에서나 활용됐기에 일상에서의 화폐 기능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쌀과 옷감(15세기 전에는 목화, 15세기 후반에는 목면)이 일반적인 화폐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중반 청나라와 일본이 내부적인 이유로 상호 직접 교역을 차단했는데, 이들 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이 둘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에 은과 동 수입량이 많아졌고, 동전의 대량 주조가 가능해지면서 화폐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동전 유통이 활발해지자 동전을 불법 주조해 유통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동전의 원료인 동은 일본에서 대부분 수입하고, 그 수입 교역 통로(현재의 부산 동래구 일대)를 사실상 국가에서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전의 불법 주조는 동전을 발행하는 장인들과 봉족들이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고, 불법 주조 현장을 급습해도 정보가 사전에 새어나가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는 불법 주조자들이 정부 관계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동전 불법 주조는 주로 흉년기에 성행한 것으로 알려졌고, 을병대기근(1695~1697) 시기에 특히 성행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정부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여러 대책을 세웠습니다. 처벌도 강력했는데, 동전을 불법 주조한 장인은 사형에 처하고, 자금을 조달한 봉족은 유배에 처했습니다.

또한, 감시를 엄격하게 하고자 주조할 수 있는 화로의 수를 제한하고, 동이 민간에서 동전 주조에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정된 놋그릇 외의 놋그릇은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유기금단사목(鍮器禁斷事目))도 제정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운영되던 동전은 19세기 후반 동전 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19세기 말 경복궁 재건에 활용할 재원을 마련하고자 흥선대원군이 1866년 발행한 화폐 당백전 때문에 화폐경제가 붕괴됐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내용으로 당백전의 명목 가치는 조선시대 대표 금속화폐인 상평통보의 100배였지만, 함유된 금속 가치는 5~6배에 불과했기에 당백전이 시중에 유통됐을 때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상황이 안 좋아지자 정부는 6개월 만에 발행을 중단하고, 1년 만에 유통 자체를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당백전보다 인플레이션을 더 유발한 요인은 청나라 동전입니다. 당시 고종은 국내 동전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청나라 동전을 대량으로 수입해 유통했는데, 청나라 동전은 상평통보와 비교했을 때 함유 금속 가치가 1/3에 불과했습니다.

1867년에서 1874년까지 청나라 동전 유통량이 조선의 국내 동전 유통량의 30~40%에 이를 정도로 그 양이 많았다고 하니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리고 1876년 이후 개항으로 인해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촉발됩니다.

왜냐하면, 외국과 자유로운 교역이 확대됐으나 금속 가치가 높은 조선의 동전이 국외로 유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동전의 순도를 급격하게 낮추었고, 동전의 가치도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위 그래프는 19세기 장흥과 영암 지역의 문중(성과 본이 같은 가까운 집안)이 만든 회계문서로 쌀 1석(약 120리터)이 상평통보 몇 냥에 거래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 알아본 문제들이 발생한 시기에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불안정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조선시대 화폐와 관련한 이야기를 알아봤는데, 위조지폐를 만들어 유통하는 부분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화폐의 기능을 갖추지 못해서 애를 먹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 과정에서 인플레이션도 발생한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서울대학교 국사학 교양강의 강사 김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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