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쩌다 부동산의 나라가 됐을까?

한국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국은 오랜 시간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경제 기반이 약해진 상황에서 전쟁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기까지 하며 가난한 나라가 됐고, 남북분단이 계속 이어지면서 안보의 위협에도 내몰리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국토와 경제 기반

또한, 당시 남한에서는 국가 운영의 중심 철학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주의였는데, 비판적인 목소리를 억누르는 도구로 사용되며 민주주의 발전에도 무시하기 어려운 걸림돌이 됐습니다.

반공주의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는 그림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겪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한국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그 발전의 과정에 부동산이 빠질 수 없는데, 한국은 어쩌다 부동산의 나라가 된 걸까요? 이번 영상에서는 이동민 교수님의 저서 <지리로 다시 읽는 자본주의 세계사>를 통해 궁금증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수출 주도 경제성장의 시작

1950~1960년대는 자본주의 세계가 경제적 대호황을 누렸습니다. 냉전체제에서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강대국은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국가에 경제적 원조와 지원을 했고, 한국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에 힘입어 한국은 1960년대에 가발·신발·섬유 등과 같이 노동집약형 산업인 경공업에 주력하며, ‘수출 주도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 발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동아시아의 지리적 상황도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국가들이 재건과 내부 혼란에 집중하는 상황이었기에 후발 국가인 한국의 발목을 잡을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1960년대 동아시아 국가들과 한국의 경제 여건

민주화와 경제 재건의 흐름

또한,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인 4·19 혁명은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분위기를 형성해 주어 한국이 수출 주도 경제성장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2공화국 정부(1960~1961) 때인 1961년 2월, 환율 개혁을 실시해 무역과 수출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는데, 외환 환율이 제멋대로라면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한국 경제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한 개혁이었습니다.

4·19 혁명의 민주화 요구

이런 경제정책 분위기는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섰다고 해도 4·19 혁명을 통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뤄낸 경험이 있던 한국이었기에 박정희 정부(제3공화국, 1963~1972)도 노골적인 군사독재 체제의 수립을 밀어붙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여론과 반대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혁명 공약’을 달성한 뒤, 군사 정권을 끝내고 민간이 주도하는 정부로 권력을 넘기겠다는 약속 후 직접선거를 통해 집권했습니다. 이후 제1공화국 시절부터 국민적 염원이자 지상 과제였던 경제 재건과 부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사 정변의 주체이기도 한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정부와 민주화를 경험한 국민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높았고, 제1공화국 시절부터 교육 분야에 중점적인 투자를 해온 덕분에 인건비가 낮으면서도 질적 수준이 우수한 노동력이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당대 개발도상국이 보편적으로 추구했던 해외 공산품의 수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국 내에서 생산하여 제조업을 육성하는 경제 기조 대신 수출 촉진을 통한 공업화라는 경제 기조를 내세웠습니다.

공업화에 필요했던 대규모 토목공사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된 상황에서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으로 나아가려면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특히 산업 활동과 무역을 활성화하려면 도로와 같은 교통망을 포함한 기반 시설과 산업 시설이 필요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1968년에 착공해 1970년에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수출 주도 경제 성장의 상징적인 역할을 합니다.

수출과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반 시설

정부의 수출 주도 경제 성장은 대성공했고, 한국은 1960년대에 무려 26.1배에 달하는 수출 실적 확대를 기록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합니다.

1960년대 한국의 수출 실적 확대

중화학공업과 도시화로 커진 토건사업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노동집약형 수출 촉진 정책의 효과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1970년대에 들어서며 전 세계가 오일쇼크 사태 등으로 인해 불황에 빠지기 시작했고, 국제 정세와 정치적 환경 등의 변화로 한국은 새로운 경제 전략이 필요해졌습니다.

오일쇼크와 국제 정세 변화에 직면한 한국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마련했고, 이러한 산업 정책에 참여하는 기업에는 시장 원리에 어긋날 정도로 막대한 특혜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1970년대 한국 경제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될 수 있었고, 경제 규모가 커졌으며, 도시화율(*국가의 총인구에 대한 도시지역의 인구 비율을 백분율(%)로 나타낸 지표)도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토목건축사업(이하 ‘토건사업’)은 더욱 활발해졌는데, 이때부터 포항제철·현대중공업·구미국가산업단지와 같은 대규모 중화학공업 시설을 비롯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토건사업은 한국 경제 성장과 발전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고용 창출을 불러온 경제활동입니다. 당연히 필요한 사업이고, 기존의 다른 산업들처럼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과 국토개발정책을 따랐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부와 고위 관료가 민간기업과 자본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자연스럽게 얻었다는 겁니다.

정부가 민간기업과 자본을 주도하는 구조

부동산 중심 성장과 토건주의 성장연합

‘토건주의 성장연합’이라 불리는 정부와 고위 관료가 민간 자본을 활용하여 국토개발정책과 토건 정책을 주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간 기업들은 정부의 계획과 행동 지침에 따라 토건사업을 수주하며 이윤을 극대화하고 몸집을 키웠습니다. 이로 인해 정부와 기업 간의 부도덕한 밀착 관계인 정경유착이 본격적으로 형성됐고, 한국 경제와 사회에 부정부패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특히 토건사업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은 대기업과 재벌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정경유착의 온상이 된 기업들은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가족끼리 독점·세습하는 체계를 만들었고, 자본을 쌓아가며 경제를 지배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한국 자본주의는 정부 주도의 초고속 압축성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땅이 돈을 벌어들이는 구조가 자리 잡았고, 한국 경제는 토건 중심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 세습

강남 개발과 부동산 불패 신화

그리고 수출과 제조업 중심의 경제정책이 군사정부의 주도 아래 강행되면서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농어촌의 인구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농어촌은 자연스럽게 뒤처졌습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서울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 인구가 너무 밀집한 상태에 이르렀고, 도시 곳곳에는 농어촌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이룬 무허가 판자촌과 빈민가가 무질서하게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과밀화 문제 해결과 새로운 주거·경제 중심지를 조성하고자 1970년대 초·중반 대대적인 강남 개발에 착수합니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아파트 건설

여러 지역 중 강남이 선택된 이유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대규모 택지와 새로운 도시 지역을 조성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잘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부 고위층과 정치 집단이 정치 자금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며, 이는 천문학적인 부동산 시세 차익으로 연결됐습니다.

강남 개발은 이전부터 토건주의의 영향력이 커질 만큼 커진 상황에서 토건사업과 부동산 시세 차익이 절대적인 돈벌이 수단이라는 확신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주며 강남 불패 신화를 만들어냈고, 부동산이 한국 사회와 경제를 완전히 지배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1980년대 이후에도 도시화율의 증대와 수도권 규모 확대에 따라 대규모 주택 건설 사업이 계속해서 진행됐으며, 일산이나 분당을 필두로 한 신도시 건설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토건주의 영향력과 토건주의 성장연합의 세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IMF 이후의 개발 사업과 부동산 의존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토건주의와 정경유착으로 인한 문제들이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97년 발생한 IMF 외환위기는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따라온 정경유착과 국토를 생산과 가치 창출의 주된 수단으로 삼았던 토건주의 성장연합의 부작용이 낳은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IMF 이후 집권한 정부들 또한 대규모 개발 사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견인하려는 정책들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사업들은 경제 회복과 경기 부양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 사업은 부동산 투기와 지역 불균형 심화, 재정 부담 증가 등 경제 성장의 한계와 부작용을 드러냈습니다.

아무래도 이러한 경향은 한국 경제가 여전히 대규모 개발 사업에 의존하는 성장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됐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업들은 경제를 일시적으로 견인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이 부동산의 나라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입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가난한 나라가 짧은 시간 안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것은 분명 한강의 기적이라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수출 중심 경제구조와 부동산 투기, 지역 불균형 같은 토건주의적 부작용을 극복해야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한국 경제의 토건 중심 성장과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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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은 부동산의 나라가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