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는 어떻게 됐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환관 또는 내시라고 들어봤을 겁니다. 궁에서 일하는 거세된 남성 정도로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큰틀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고려시대 때 환관이 궁에서 일하는 거세된 남성이라면 내시는 국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는 남성입니다. 다만, 고려시대 말기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후에는 의미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환관제도는 동아시아에서는 중원(중국)과 한반도에서만 존재했고,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때 존재했다고 합니다.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제도이나 왕조시대를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어서 낯설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쨌든 이들을 봤을 때 다양한 궁금증이 떠오를 겁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궁금증을 일부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가장 궁금한 내용은 환관이 되는 과정일 겁니다. 환관의 기본 조건은 거세한 남성입니다. 선천적 환자(고자(鼓子)를 의미. 이하 마찬가지)가 아닌 이상 음경이나 고환이 있었는데 없어져야만 합니다.

없어지는 과정과 관련해 자세한 방법을 설명하는 국내 사료(역사 연구에 필요한 문헌이나 문서 등)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실제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고려시대의 환관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보면 고려시대의 환자는 크게 위 4가지 경우에서 선발했다고 합니다. 1, 2, 3번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4번의 경우는 상상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어떻게 잘랐을까요?

중원 지역에서 후천적으로 환관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이 있습니다. 참고해보면 음경과 고환을 둘 다 자르거나 고환만 잘랐다고 합니다. 아마 한반도 지역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을 겁니다.

고환 절제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음경 절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와 관련해 비뇨기과 선생님에게 자문해보니 음경절제술(Penectomy)은 지금 하기에도 어려운 수술이라고 합니다.

수술 방법이 잔인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낫 모양으로 휘어진 작은 칼을 이용해 음경과 고환을 동시에 잘라내고, 나무못 등을 요도에 꽂습니다. 그리고 수술 직후 두 명의 집도자가 피수술자를 부축해 2~3시간 정도 방안에서 걷게 한 다음에 다시 눕히고,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않게 한 뒤 요도에 꽂아둔 나무못을 뽑습니다. 그러면 분수처럼 방뇨하는데, 이는 수술이 성공했음을 의미합니다.

수술 후 100일 정도가 지나면 상처가 아뭅니다. 이후 왕부(王府)로 옮겨져 환관의 실무를 1년 정도 습득하고, 궁성으로 들어가 새로운 직책을 부여받습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고, 한반도 지역에서도 비슷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으나 확실한 내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때는 스스로 거세했다는 사료가 없기도 하고, 조선 건국 직전에 명나라에서 고려 조정에 강제로 거세해 명나라로 환관을 차출하는 방식을 금하라고 명령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든 조선이기에 선천적 환자나 사고로 환자가 된 자를 환관으로 선발했을 것이고, 이것이 환관이 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은 방식은 선발이 어려울 수 있어서 성종과 연산군, 중종 대에 환자를 궁궐 밖에서 부리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선발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전기 때 환관의 수는 10여 명에 불과했으나 조선시대 때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권1<이전>의<내시부>를 보면 환관의 수를 총 140명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로 환관의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청나라의 경우 환관이 적게는 3천여 명에서 많게는 1만 2천 명 정도가 필요했다고 하는데, 명나라 말기에 비해서는 숫자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명나라 말기 때는 환관이 무려 10만 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원 지역의 환관은 일단 임용되면 권력과 부를 얻기 쉬워서 하층민들이 신분 상승을 노리고 스스로 거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예 자금성 서문인 서화문 밖에 헛간이라는 수술실이 있어서 국가 공인 도자장(刀子匠)이 수술을 전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환관이 환자여야만 하는 이유는 황제의 후궁을 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나 음양 관점의 이유도 있습니다. 음은 여성성을 상징하고, 양은 남성성을 상징합니다. 황제는 강력한 양의 기운을 가졌다고 해서 황제를 보좌하는 자들은 거세하여 음의 기운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 자의로 환관이 되고자 했을까요? 아무래도 시대배경상 강제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환관은 높은 관직을 받고 왕의 총애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자들이 환관을 희망했습니다.

실제로도 환관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왕과 가깝고,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등의 주요 직책을 맡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과 고려의 부패 원인이 환관에 있다고 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관료들은 공민왕(고려의 제31대 국왕)대부터 환관들의 정치개입을 적극 반대했고, 조선 건국 후 법제화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경국대전>권1<이전>의<내시부>를 보면 환관이 소속된 내시부의 역할은 궁궐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감시, 청소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내관(환관)의 품계는 7품 이하로 낮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환관을 정치로부터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대신 환관이 부귀를 추구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용인했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유수원이 “환관을 재물로써 견제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귀에 집착하는 모습을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방증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환관들에게도 가족이 있었습니다. 환관의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환관이 중심이 되는 가족을 말하는 것으로 위 사료들을 보면 조선시대 환관 2명 중 1명 이상은 혼인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거세했으므로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어려웠으나 분명 존재했고, 이는 환관이 궁궐 업무를 볼 때 뒷바라지를 해줄 집안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의 <환관>에 따르면 환관은 선천적인 환자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기도 했는데, 그 양자는 자신이 속해있던 친족과 완전히 연을 끊어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선조를 보필한 내시 김계한은 13대까지 환관을 배출한 사례가 있습니다. 환관은 일반 남성에게 있는 것이 없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이 없으나 그 시대 상황에서 환자는 의미가 많이 달랐을 겁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의 <환관>에 따르면 양반들은 환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더럽고 흉측하여 실로 인류가 아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도 환관을 희망하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여담으로 환관과 관련해 환자가 됐을 때 수명이 평균보다 길었다고 합니다. 내시 족보에 나온 777명 중에 출생일과 사망일을 알 수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에 오른 81명의 내시와 양반 족보에 오른 남성 2,589명의 수명을 조사했을 때 양반 남성의 수명은 51~56세였는데, 환관은 70세로 장수했다고 합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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