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노비 중에서 대감집 노비가 정말 더 좋았을까?

노비(奴婢)는 남자 천민 ‘노(奴)’와 여자 천민 ‘비(婢)’를 합친 말로 과거 우리나라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 신분에 해당하는 사회 계급이었습니다.

대부분 국가가 그랬듯이 우리나라도 19세기에 신분제를 폐지하여 지금은 사용할 이유가 없는 용어인데, 직장인들 스스로가 직장 생활을 노비 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농담 삼아 노비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때 함께 등장하는 표현으로 “노비가 되더라도 대감집 노비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기업을 대감집에 비유하여 중소기업보다 월급이나 복지 처우 등이 비교적 좋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제의 의문이 생깁니다. 진짜 노비가 있었을 때도 대감집 노비가 정말 더 좋았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제 조선시대의 삶을 반영한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조선시대 때 노비는 세계사에서 통용되는 천민 개념인 노예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주인의 재산이기에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었으며, 신분 상승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은 여러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관청에 소속된 노비인 공노비는 매매할 수 없었고, 아무리 권력자나 부자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또 조선시대 노비는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법적으로 보호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재산을 축적한 노비는 자신의 노비를 구입하기도 했고, 흔치 않은 사례로 재산을 대규모로 축적하여 신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는 주로 흉년 때 정부에서 재정 부족으로 급하게 돈을 필요로 하는 경우 천민 신분을 면제하는 증서(=노비면천첩)를 파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조선시대 때 노비에 대한 처우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비들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노비는 천한 이름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름으로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름만 봐도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둘째로, 체벌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남긴 기록을 보면 어떤 비(여자 천민)가 잘못을 저질러 관아에 잡혀가자 죽지 않을 정도만 때려도 좋다는 뜻을 수령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잘못을 저지른 어떤 비에게는 간단히 경고하는 차원에서 종아리를 50대 치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이 남긴 기록에도 ‘잘못을 저지른 두 명의 비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채찍으로 직접 40대씩 쳤다’라고 남겨져 있습니다.

셋째로, 노비들도 가정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단, 주로 타의에 의한 결혼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신의 노비를 평민과 결혼시키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은 자신의 노비가 됐기 때문입니다.

16세기 경상도 예안 오천에 거주한 광산 김씨(光山金氏) 분재기(分財記, 재산의 상속과 분배를 기록한 문서)를 보면 노비 중 절반 이상이 평민과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550년에 작성된 광산 김씨 가문 상속 문서에 따르면 노비 210명 중 노(남자 천민)가 평민 여성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64명입니다.

이는 평민 남성이 비(천민 여성)와 결혼하여 낳은 숫자가 빠진 것이기에 단순히 평민 남성이 비와 결혼하여 낳은 수가 64명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무려 100명이 넘는 노비가 평민과 노비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평민은 도대체 왜 노비와 결혼했냐는 것일 겁니다. 그 이유는 양반의 노비가 배우자면 굶어죽을 일이 없었고, 노비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반사적으로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노비 입장에서도 본인이 원하는 상대가 아니어도 일단 평민과 결혼하거나 자기 자식을 평민과 결혼시키면 주인이 일부 재산을 주기도 했고, 노역에서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 혜택을 주었기에 이해득실이 맞았습니다.

혜택 중 하나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면제받는 것으로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므로 주인을 위해 노역하거나 주인에게 세금을 내면 됐습니다.

또 흉년에 굶는 걱정을 안 해도 됐습니다. 지금과 달리 중세시대 흉년은 생존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했기에 큰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주인 입장에서도 재산인 노비가 굶어 죽으면 재산과 노동력이 감소하는 것이므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노비의 배우자도 간접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에 평민임에도 양반의 노비와 결혼한 것이고, 심지어 스스로 양반의 노비가 되고자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겁니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연산군 때부터 국가재정이 증대되고 세금이 급속히 늘어나자 몰락한 평민들이 양반의 노비와 결혼하고자 희망했고, 아예 노비로 직접 팔려 가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습니다.

이외에도 권력 있는 양반 중에서는 노비들의 뒷배를 봐주기도 해서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평민이나 노비들에게 국가가 내리는 동원 의무를 회피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또 노비로 들어간 사람 중에서 주인의 권력을 믿고 국가에 바치는 노역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대감집 노비가 된다는 것이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련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일견 조선 사람의 삶과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 꽤나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김한빛 강사(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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