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중매를 통해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중매가 존재하긴 하나 결혼 당사자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과 비교했을 때 그 시대의 중매는 부모의 의사에 따라 진행됐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결혼은 가문 간의 결합이라는 전통적 가치관과 유교적 사회 규범이 중심이었기 때문인데, 이성 간의 만남은 개인보다는 가족 간 이익과 집안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화를 맞이했고, 지금 시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됐습니다. 여기서 주제의 의문이 생깁니다. 연애는 언제부터 결혼과 분리된 형태로 자리 잡았을까요?
일단 한국에서 연인 간의 사랑을 뜻하는 ‘연애(戀愛)’라는 단어와 개념은 근대에 서구식 개념이 들어오면서 Love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성 간의 애정 이야기는 존재했으나 부부 이외의 이성 관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공인된 관습으로 포함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19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랑’과 ‘연애’라는 단어는 굉장히 낯선 말이었습니다.
이는 19세기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기록을 찾아보면 ‘연애(戀愛)’라는 한자어는 1847년경 중국의 선교사 월터 헨리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가 『영화사전(英華事典)』에서 ‘Love’를 ‘연애’라고 번역한 것이 최초의 사례입니다.
그전까지 Love는 ‘애정(愛情)’ ‘총(寵)’ ‘인(仁)’ 등으로 번역됐습니다. 이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애정은 전반적인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포괄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총은 누군가를 특별히 귀히 여기며 돌보는 보호적 성격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은 유교적 미덕에서 비롯된 인간다움과 자비를 강조한 개념으로 도덕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보다시피 우리가 아는 연애나 사랑의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Love를 이렇게 번역했다는 건 Love를 단순한 감정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했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결혼과 분리된 연애, 이른바 자유연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때는 1920년대에 이르러 소설을 통해서입니다.
그 당시 연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점차 하나의 문화적 상품으로 자리 잡았고, 자유연애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한국에 들어온 스웨덴의 사상가 엘렌 케이(Ellen Key)의 철학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엘렌 케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을 최상의 원리로 강조했으며, 사랑과 행복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근본적인 동력이므로 자유결혼은 물론 자유이혼까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당시 젊은 세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래서 엘렌 케이를 자유연애의 선구자이자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연애의 시대를 연 학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연애는 근대 이후에서야 결혼과 분리된 독립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 시대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성(性)적으로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신가요?
고려의 연애 문화에 대한 기록은 송나라의 역사서 『송사(宋史)』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성 간에 스스로 부부가 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고, 여름에는 한 냇물에서 함께 목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에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도 비슷한 감상을 남겼습니다. 그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여럿이 냇가에 모여서 성별 구별 없이 옷을 언덕에 벗어 놓고 몸을 씻었으며, 물살에 속옷이 비쳐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 가요에는 이성 간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작품도 많습니다. 이는 이성 간의 사랑이 자유로웠던 고려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고려사』를 보면 여성이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했다는 기록도 여럿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명종 대에 관직에 오른 관리 최세보에게는 최비라는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태자가 총애하던 여종 한 명이 궁궐 담장 안에서 최비에게 귤을 던져 호감을 표현했고, 최비는 그 여종과 몰래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발각된 뒤 왕은 최비를 법으로 처벌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변호로 처벌을 면했고, 여종은 궁에서 쫓겨나 비구니가 됐습니다. 문제는 최비가 비구니가 된 여종을 계속 만났다는 것으로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최비는 결국 유배를 갔습니다.
이 일화는 고려 시대 여성들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으며, 신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연애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회가 이런 분위기여서 그런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간통하는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관대했습니다.
또 흥미로운 일화로 고려의 권력자 최충헌의 노비였던 동화라는 여인은 빼어난 미모로 유명했는데, 동화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 최충헌과도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최충헌이 장난삼아 누구를 남편으로 삼고 싶은지 물었고, 동화는 망설임 없이 최준문이라는 인물을 지목했습니다. 이를 들은 최충헌은 즉시 최준문을 불러 고려군의 지휘관 중 하나인 대정(隊正)으로 임명했고, 이후 최준문은 대장군이 되었을 뿐 아니라 최충헌의 오른팔로 활약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성 노비가 자신의 주인과도, 마을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은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했다는 것은 고려 사회가 성관념에 있어서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런 사상들이 변해간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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