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원할 때 언제든지 편하게 목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바디워시도 없었고, 온수는커녕 냉수조차 공급해줄 장치도 없었기에 궁금증이 생깁니다. 옛날 사람들의 목욕 문화는 어땠을까요?
고대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연대기 자료를 살펴보면 목욕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 기록을 살펴봤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목욕은 별로 없었고, 주로 큰일을 앞둔 사람이 신체를 정결히 할 때나 치료의 목적이 있을 때 등 이유가 있을 때나 목욕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고려시대는 고대시대보다 목욕을 자주 했는데, 고려의 중심 종교가 불교(佛敎)였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불교는 목욕재계(沐浴齋戒), 그러니까 목욕을 해 몸을 정갈히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는 일을 율법으로 정하고 있으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풍습은 조선조(*1392~1910년에 한반도를 지배하던 왕조)에 이르러 많이 쇠퇴했는데, 조선의 중심 종교는 유교(儒敎)였기 때문입니다. 유교는 옷을 벗는 행위를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고, 목욕을 위해 옷을 벗는 일도 해당합니다. 그렇다고 안 씻을 수는 없기에 전신욕 대신 부분욕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가옥구조에는 목욕탕이 따로 없었고, 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많이 봤을 텐데, 세수간 나인이 목욕물을 일일이 바쳐준 것으로 씻었고, 양반가에서도 세숫물과 손 씻는 물, 발 씻는 물, 양치질에 쓰는 물 등을 따로 받아서 썼습니다. 손과 발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씻었고, 양치할 때는 소금을 사용했으며 신체 중 아랫부분은 매일 씻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감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대인도 머리카락이 길면 머리 감기에 어려움을 느끼는데, 옛날에는 장발에 망건, 족진머리 등으로 정리하고 다녔으므로 머리카락을 한 번 감는 것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비됐기에 그렇습니다. 대신 매일 아침 머리카락에 기름을 바른 다음에 참빗으로 비듬과 이, 먼지 등을 털어냈습니다.
이렇게 씻는 것이 답답해 보일 수 있는데, 중인계급 정도만 되어도 밖에서 내놓고 목욕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삼짇날, 단오, 유두날, 칠석, 백중날 등의 날에는 상층 신분 사람들이 전신욕을 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묵인하여 이때 날 잡고 전신욕을 했습니다. 물론 이때도 함부로 옷을 벗으면 안 됐고, 얇은 옷을 입은 채 씻어야 했습니다
최상류층은 욕분(*따뜻한 연못으로 온천의 일종)을 두거나 온천으로 여행을 가는 등을 통해 주기적으로 치료나 피부 미용 등의 목적으로 목욕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처럼 매일 전신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씻을 때도 예의가 존재합니다. 세수할 때는 입과 코에서 소리가 나면 안 되고, 가장자리에 물을 흘리면 안 됐습니다. 이외에도 벽에 물을 뿌리거나 늦게 씻는 것도 예의에 어긋났습니다.
손을 씻을 때는 손에 묻은 물을 창문이나 벽을 향해 털면 안 됐고, 발을 씻을 때는 시중드는 하인이 아무리 천하다고 해도 발을 문지르거나 때를 밀게 해서는 안 됐습니다.
다른 집에서 씻는 경우 이에 따른 예절도 있었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세수를 권하면 하인은 물을 곧바로 대령해 세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고, 만약 손님이 망건을 벗고 씻기를 기다리다가도 하인이 제때 물을 대령하지 못하면 망건을 바로 다시 쓰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또한, 세수하고 주인이 쓰는 수건으로 닦으면 예의가 아니었고, 주인이 수건을 제공하면 콧물이나 침을 묻히지 말고 수건 끝으로만 살짝 닦아야 했습니다.
여기까지 옛날 사람들의 목욕 문화에 관해서 알아봤는데, 제대로 씻지 못하면 몸에서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실제 악취를 풍기기도 했기에 조선의 사대부들과 부인들은 향낭이라고 향이 나는 주머니를 차고 다녔습니다.
참고로 향낭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나 가마 등 사람과 가까운 곳이나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에도 달아두었습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서울대학교 국사학 교양강의 김한빛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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