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집들은 방범 장치가 있었을까?

많은 현대인이 외부인이 집에 침입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문단속을 잘합니다. 일부는 현관문 잠금만으로 불안해서 이중·삼중으로 방범 장치를 해놓거나 보안 업체를 고용하는데, 이러한 장치들이 침입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어도 유의미한 역할을 해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때는 어땠을까요? 미디어를 통해 그 시대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봤을 때 서민들이 사는 민가는 침입이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대문은 없다시피 했고, 담장은 없거나 쉽게 넘을 수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방이 보이는데, 방문은 가늘게 쪼갠 댓개비에 창호지 한 장을 바른 지게문이라서 방범의 기능은 없어 보입니다. 또 신고할 연락 수단도 없을 때라 도둑질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거 사람들은 현대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기에 농사를 짓는 동안에는 거처에서 멀리 떠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다양한 이유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적어도 농사를 시작하면 일정 기간은 멀리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을에는 아주 많아야 수십 가구에서 백여 가구밖에 살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공동체에 대한 기록은 많이 없으나 과거 생활 방식이 남아있는 20세기 후반 농촌 인류학 연구 사례를 참고해보면 창평의 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사람은 대동회(大洞會)라는 공통 조직에 속했고, 직간접적으로 조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동회는 모내기 품삯, 저수지 공사 관련 사항, 마을 내 각 계 모임의 지출 등을 직접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쳤는데, 이처럼 마을 구성원이 서로를 잘 알고 공동체 활동을 지속했기에 친하든 친하지 않든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부대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대부분 사람이 도보 생활을 했을 정도로 교통수단이 발달해 있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숙박시설도 발달하지 않았기에 외부인이 타지에서 주변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있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즉, 옛날 사람들은 소수의 인원이 공동체를 이루며 모여 살았고, 멀리 이동할 수 없었으며, 외부인이 오면 다 알고 있기에 외부인이 도둑질하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또 내부인이라고 해도 서로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날 수 있었기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도둑질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적 떼가 대놓고 습격하는 상황이 있고, 조그맣게 마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이 아니라 현대와 같이 공간 대비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수도 한양은 예외입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한 무리의 도적 떼는 그 수가 적게는 여러 명, 많게는 수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야담집에는 도적 떼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인적이 드문 길목에서 행인들을 약탈하거나 마을을 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는 개인의 거처에 방범 장치가 있다고 해도 무의미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과 성격이 다르기에 여기서 말을 줄이겠습니다.

각설하고, 조선시대의 한양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습니다. 전국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고, 부자와 고관대작(*지위가 높은 벼슬 또는 그런 자리에 있는 인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현대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문제는 옛날에 지금과 같이 발달한 방범 장치가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돈이 많거나 벼슬이 높은 사람은 많은 하인을 거느리면서 경호와 방범을 책임졌을 겁니다. 하지만 대다수 서민은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이런 이유로 한양은 일괄적으로 야간 통금 정책이 시행됐습니다.

한양은 도성 방비와 치안을 목적으로 2경(밤 9~11시)부터 5경(새벽 3~5시)까지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전면적으로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통금 시간 때는 포도청의 포졸과 한양 일대에 배치된 군대인 삼군문 군인이 순찰을 하였는데, 포도청은 한양 도성 내외를 16개 구역으로 나누어 순찰을 하였고, 조선 후기 숭례문 바깥에도 거주 구역이 확장됐을 때는 숭례문 바깥쪽에 4개 구역을 집중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삼군문 역시 포도청만큼 광범위한 구역은 아니나 포도청 순찰 구역과 최대한 겹치지 않게 순찰했습니다. 이 순찰관들은 순라꾼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순찰 방식은 19세기 말 외국인 기록에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통금은 한양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됐으나 승정원에서 발급한 예외 허가 문서인 물금첩(勿禁帖) 등의 문서를 소지했거나 질병이나 출산 등으로 급박한 사정에 처한 사람은 예외로 두었습니다. 참고로 야간 통금은 어긴 시간대에 따라 처벌 강도가 달랐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조선시대 때 일반 마을에서는 도적 떼의 위험은 있었으나 일상 속 방범에 대한 문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됐고, 현대와 사는 것이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도 한양에서는 야간 통금 정책이 방범 장치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서울대학교 국사학 교양강의 강사 김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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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집들은 방범 장치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