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통증이란 자극이나 손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 몸의 이상을 알려주는 경고 장치이자 회피 반응을 일으키는 보호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이 위험한지조차 알 수 없게 될 겁니다.
이와 관련해 2006년 SCN9A 유전자 돌연 변이로 인해 나트륨 이온 채널(Sodium ion channel)의 기능이 사라져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십대 소년을 발견했다는 연구결과가 <네이처(Nature)>에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안타깝게도 지붕에서 뛰어내릴 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14살이 되기도 전에 사망했습니다.
이처럼 통증은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통증을 완화하거나 차단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신체적 감각을 유지하면서 통증을 가볍게 하는 진통제나 감각의 소실을 유도하여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마취제를 사용합니다. 여기서 주제의 의문이 생깁니다. 마취제는 주로 시술이나 수술 전에 사용하는데, 마취제가 없던 시대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마취제가 없던 시대에도 살기 위해서 수술을 ‘그냥’ 했습니다. 그 시대의 수술은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고, 여러 문헌에서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통증을 줄이거나 차단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40년대 중반까지 외과 수술에 관한 서적이나 논문에서 통증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수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환자의 의식을 잃게 하고자 목을 조르거나 머리에 충격을 가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로버트 보일(Robert Bolye)과 얀 밥티스타 판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의 선구적 연구에 힘입어 기체 화학이 번성하면서 근대적 마취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먼저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는 스티븐 헤일즈(Stephen Hales)가 18세기 초에 고안했던 실험 장치를 이용해 여러 종류의 기체 실험을 진행하다가 1772년 아산화질소(N₂O)를 발견했고, 1775년 합성 방법을 발표합니다.
발견 당시 해당 기체를 어떻게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보다 순수하게 기체의 물리적·화학적 성질을 분석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기에 마취 효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아산화질소의 마취 효과를 처음 알아챈 사람은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였습니다. 데이비는 저서를 통해 아산화질소의 역사와 화학 및 생리학적 특성, 오락거리로의 활용 등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 육체적 통증을 없애는 능력이 있어서 출혈이 심하지 않은 외과 수술에 사용할 수 있다고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의료용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산화질소를 흡입하면 웃음이 나고 얼굴 근육에 경련이 발생해 웃는 듯한 표정이 나타나 웃음 가스라고 불렸는데, 주로 상류층에서 오락거리로 사용했으며,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흡입의 효과를 보여주는 공연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러다가 1844년 미국의 치과의사 호러스 웰스(Horace Wells)가 웃음 가스 공연을 보러 갔다가 아산화질소를 흡입한 사람이 나무 벤치에 다리를 부딪혀 다쳤음에도 다친 걸 모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통증이 심한 치과 치료에 아산화질소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동료 치과의사에게 자신의 발치를 부탁하며 아산화질소의 마취 효과를 직접 실험해 봅니다. 이후 여러 환자를 대상으로 십여 차례 무통 발치에 성공했고,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 MGH)의 수술 극장에서 무통 수술을 공개 시연했습니다.
시연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수술받는 사람이 신음 소리를 내며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수술받은 사람에 따르면 통증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나 사람들이 보기에는 통증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1846년 11월 18일 같은 수술 극장에서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자였던 치과의사 윌리엄 모턴(William Morton)이 에테르(ether)를 사용해 무통 수술에 성공했다는 논문을 보게 됩니다.
이 소식에 웰스는 자신이 최초의 마취제 발견자로 인정받기 위해 애썼는데, 파리의학협회(Paris Society of Medicine)에서 1848년 1월 12일 공로를 인정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1848년 1월 24일 클로로포름의 마취 효과를 연구하다가 중독되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됐든 당시 주로 사용한 마취제는 에테르였습니다. 10월 16일을 에테르의 날 또는 세계 마취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1846년 10월 16일 윌리엄 모턴(William Morton)이 수술 극장에서 에테르 마취에 성공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날 공개 시연을 보던 외과의사 헨리 비글로(Henry Bigelow)는 보스턴 의학 및 외과 학술지(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 시연 결과를 발표했고, 모턴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해주며 에테르 마취 사용을 퍼지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에테르의 최초 발견자가 모턴처럼 보이는데,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에테르의 마취 효과를 먼저 확인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논쟁이 생겼습니다.
다만, 현대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캐나다 의사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는 “과학에서 공적은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이 아니라 세계를 최초로 납득시킨 사람에게 돌아간다.”라는 프랜시스 다윈(Francis Darwin)의 말을 인용하며 모턴의 손을 들어주었고, 사람들도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마취제를 널리 사용하게 된 부분에는 역사적 계기가 하나 있는데, 중세 이후 기독교 문화에서는 출산의 고통을 원죄의 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무시하게 해주는 마취는 신이 주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음모라고 생각해 사용을 꺼리는 일도 있었으나 빅토리아 여왕(Alexandrina Victoria)이 1853년 여덟 번째 아이인 레오폴드(Leopold) 왕자와 1857년 아홉 번째 아이인 베아트리스(Beatrice) 공주를 출산할 때 마취의사이자 현대 의학의 창시자 존 스노(John Snow)가 클로로포름을 사용하면서 논쟁이 급격히 사그라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주제와 관련한 내용을 다뤄봤습니다. 책에서는 역사적 논쟁과 관련해 더욱 깊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최대한 축약해 다뤄봤습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도서 <역사가 묻고 생명과학이 답하다>, 저자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전주홍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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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작에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습니다. 읽다가 재밌어서 콘텐츠로 만들어보고 싶어 허락을 구한 뒤 만들었습니다. 도서 중 소주제를 바탕으로 제작해봤는데,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도서와 관련해 미생물, 화학 등 역사와 관련한 시리즈가 몇 개 더 있어서 괜찮은 주제는 추후에도 다뤄볼 생각입니다. 재밌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