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서 왕의 사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왕조시대에서 왕은 절대권력자이고, 왕의 자리는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왕의 아들에게 세습됩니다. 그런데 왕은 왕비 외에도 후궁이 있고, 이들 사이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낳게 됩니다.

태어난 자식 중에서 딸은 왕위를 이을 수 없으므로 제외하고, 여러 아들 중 왕비에게서 태어난 첫째 아들인 적장자(嫡長子, 정실이 낳은 맏아들)가 왕위를 잇습니다.

오해하면 안 될 것은 무조건 적장자가 왕위를 잇는 것은 아닙니다. 세자로 책봉돼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왕비의 첫째 아들이 아니거나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더라도 세자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위 계승권을 두고 싸움을 벌이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왕자의 난이라고 해서 조선 초기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들끼리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왕의 딸인 공주(왕비의 딸)나 옹주(후궁의 딸)는 왕위 계승권 경쟁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절대권력자인 왕의 딸이라는 위치에 있으니 꽤 괜찮은 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왕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서 왕과 왕비의 정치적 수단으로 배우자가 결정되는 단점이 있긴 하나 당시 시대 상황에서 공주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봤을 때 이러나저러나 괜찮은 자리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주와 결혼할 상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절대권력자인 왕의 사위니까 정말 괜찮은 자리가 아니었을까요?

먼저 의빈(儀賓)이 되는 방법은 간택입니다. 왕비를 간택하는 것처럼 의빈 후보자를 삼간택(三揀擇)이라고 하는 세 차례의 절차를 거쳐 결정했습니다. 참고로 이러한 간택 절차는 태종 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전에는 신하들과 논의하거나 왕이 결정했습니다. (*의빈(儀賓)을 부마(駙馬)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경국대전에 실린 조선 국왕 사위의 공식 명칭은 부마가 아닌 의빈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실제 왕위에 오른 왕의 의빈으로 간택된 수는 모두 92명이었는데, 이들의 삶을 엿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의빈도 『경국대전(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의 법전)』 반포(1485년) 전까지는 일반 관료처럼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세종의 의빈이었던 윤사로는 계유정난과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는 등 정치에 적극 참여해 좌익공신 1등,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제도로 벼슬을 할 수 없게 했으나 왕의 사위인 만큼 일정 규모의 녹봉과 주택,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덕분에 문화예술 활동을 많이 하면서 글씨나 그림, 문장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등에 갈 때 외교사절 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그러면 의빈 중에서 이혼한 사람은 없었을까요? 이혼한 적은 없고, 재혼을 요구한 경우는 있었습니다. 공주나 옹주가 결혼 이후 일찍 죽은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효종의 의빈이었던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부인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양자인 정효선이 일찍 죽어서 숙종에게 재혼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고, 의빈이 재혼할 수 없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정재륜은 종손(從孫) 정석오(鄭錫五)를 죽은 양자 정효선(鄭孝善)의 양자로 들여서 대를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사람에 따라 왕의 사위는 그다지 탐나지 않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과거에 급제해 출세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는데, 의빈이 되면 강제로 꿈을 접어야 하므로 사회 분위기상 의빈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옹주에게 분풀이를 한 의빈도 있었는데, 바로 선조의 의빈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 거부한 자도 있습니다.

태종은 지춘천군사(知春川郡事)였던 이속(李續)의 아들을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시켜서 의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이속은 정신옹주의 생모인 신빈신씨(信嬪辛氏)의 출신(*태종의 후궁이자 정신옹주의 생모로 나인 출신이다.)을 들먹이며 거절 의사를 보였습니다.

태종은 분노했고, 이속에게 장(杖) 1백 대와 지위를 박탈한 뒤 유배를 보내 창원(昌原)의 관노(官奴)가 되게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의빈의 일반적인 삶과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살펴봤는데, 별다른 욕심만 없다면 꽤 좋은 자리로 보입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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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위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