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도 축의금이 있었을까?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족이 되는 사회적 제도입니다. 결혼하는 대부분 사람은 결혼식을 열어 가족이나 친지 등을 초대하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축의금을 내는 편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결혼식뿐만 아니라 장례식이나 돌잔치 등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포괄적인 용어는 부조(扶助)금이라고 하고, 크게 좋은 일에 내는 축의금과 슬픈 일에 내는 부의금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부조금은 서로 간의 관계를 강화하고, 사회적 연대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개중 조선시대의 부조금 문화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하는데, 조선 사회 특성상 장례식과 제사를 많이 중시하기에 장례식에 많은 부조금이 모였고, 결혼식에도 부조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금액은 꼼꼼히 기록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조금 액수를 정하는 마을 규정까지 있었다는 것인데,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자신들이 거느리는 마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규약을 만들었습니다.

이 규약은 대체로 북송 시대부터 내려오는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과 이를 중국 남송(南宋)시대의 성리학자 주희(朱熹)가 보강하여 만든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참고해 현지 사정이나 다른 지역 규약을 고려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 중 『주자증손여씨향약』에는 “혼례에 축하해주는 것이 마땅하고, 축하할 시에 선물을 주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때 줄 수 있는 선물에는 음식과 술, 옷감, 과일 등이 있었고, 수량에 대한 상한과 하한도 정했습니다. 다만, 결혼식에 반드시 갈 필요는 없고, 부조만 보내도 된다고 했습니다.

조선에서 만든 향약도 이를 현지화해서 결혼식에 내야 하는 부조금 액수를 구체적으로 정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은 1475년경 태인 지역에서 만든 향약 규정을 계승했다고 추정되는 『태인고현동향약(泰仁 古縣洞 鄕約)』이 있는데, 인당 백미 7홉으로 규정했습니다.

기타 다양한 향약에서는 개인당 결혼 부조금을 적게는 백미 7홉에서 많게는 5승까지 규정했고, 닭이나 대구 등 고기와 생선으로 규정한 곳도 있었습니다. 돈으로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의 화폐 정책이 오랜 기간 자리 잡지 못해서 동전이 보급된 후에도 쌀이나 식량 등을 통해 물물교환을 많이 했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백미의 가치를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기록마다, 학자마다 기준이 워낙 다르기에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내용은 자체적으로 환산한 내용임을 알립니다.

임진왜란 때 학자 오희문에 의해 작성된 일기 『쇄미록(瑣尾錄)』에 따르면 조선시대 때 일반적인 성인 남성은 한 끼에 쌀 7홉 이상을 먹었다고 합니다. 당시 식사는 하루 두 끼가 원칙이었으므로 대략 15홉을 하루 식사량으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1인 가구 한 달 평균 식비는 66만 원이라고 하니 하루에 약 2만 2천 원을 쓴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7홉은 하루 식사량의 절반이니 대략 1만 원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고, 5승은 50홉이므로 대략 7만 원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에 따라 1만 원에서 7만 원이 조선시대 때 내는 축의금 액수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대와 비교했을 때 적은 액수로 보이지만, 현대의 결혼식보다 부담하는 금액이 적었을 것이므로 합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인 부조금은 얼마나 됐을까요?

축의금 내역을 적은 부조록(부조기, 부전록이라고도 함)을 보면 내역이 많지는 않았던 것인지 장수가 많지는 않고, 대략 한 건당 1권, 그것도 1~4장 정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원 단위로만 적는 것이 아니라 각종 물품을 상세하게 적어야 했음을 고려하면 그 양이 적은 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콘텐츠의 대부분 사례는 강원도를 바탕으로 함(다른 지역 사례는 거의 나오지 않음))

실제 부조한 사람의 수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강릉 김씨(江陵 金氏) 삼척파(三陟派) 향길댁에 남아있는 13건의 부조기(*결혼식 12건·잔치 1건)를 살펴보면 부조자 수가 많은 경우 90명 정도이고, 적으면 10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 집안이 당시 지방의 유력 가문임을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가까운 사람들만 부조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부조한 물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는데, 쌀이나 벼, 보리, 참깨, 콩 등 곡식류부터 시작해서 술, 떡, 닭, 개, 감, 대추, 밤, 배, 대구, 북어, 전어, 젓갈 등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보다시피 대부분 먹을 것이고, 술과 닭, 곶감, 떡, 달걀이 많았다고 하며, 돈이나 촛불, 옷 등의 물품을 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이들을 요즘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추론하기 어려운데, 이 기록이 강원도에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쌀보다는 다른 식자재를 부조금으로 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양으로 살펴보면 술은 1동이를 부조한 사람이 제일 많았고, 곶감은 대체로 2줄, 달걀은 10개 정도를 부조했다고 합니다.

현대인이 보기에 성의 없어 보이지만, 옛날에는 술이나 곶감, 달걀 모두 대량 생산이 어려웠기에 수 만원 이상의 값어치를 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서울대학교 국사학 교양강의 강사 김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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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결혼식 때도 축의금을 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