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은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북대문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종로와 중구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도성이 존재했고, 도성의 관문으로 네 개의 대문이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을 지켰습니다.

이 중 서대문은 일제강점기 때 도시 확장으로 사라졌지만, 과거 모습을 담은 사진과 누각의 현판이 남아 있어 그 존재는 여전히 사람들 인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동대문과 남대문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잘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북대문도 규모가 작긴 해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에서 사라진 이유가 뭘까요?
조선은 수도를 옮기기 위해 한양도성을 건립하면서 북쪽 문을 숙청문(肅淸門), 동쪽 문을 흥인문(興仁門), 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 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으로 명명했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숙청문은 북악산의 가파른 경사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험준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문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크기도 다른 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고, 옛날 지도 등을 살펴봤을 때 과거에는 성문 위에 으레 있어야 하는 누각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숙청문은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이름이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게다가 숙정문은 문을 자주 닫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대에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숙정문을 항상 닫아두어야 한다는 건의가 올라왔고, 왕이 이를 수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지을 때부터 험준한 산에 짓고, 대부분 닫아두었기에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친숙한 문이 아니었던 것인데, 이런 곳에 문을 지어 놓은 이유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원 국가들은 도성을 지을 때 사대문을 두었습니다. 북문을 포함한 각 문의 규모는 상당히 컸고, 통행량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체로 중원 국가들의 수도가 평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정부도 중원 국가 도성의 전통을 참고하여 수도 성곽을 건축하고 사대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중국과 달리 큰 성을 지을 수 있는 평지가 많지 않았고, 조선 정부는 도성을 지을 때 풍수지리적인 측면을 감안해 산을 북쪽에 두고 강을 남쪽에 두는 배산임수 지형을 따랐기에 북대문은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산에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북대문은 지리적으로 사람들이 모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에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지형적인 요인 외에도 북악산 일대가 오랜 기간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영향도 있습니다.
출입 금지 구역이 된 배경에는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정부 시절 북한에서 무장 특수부대(124부대)를 보내 남한에 침투한 사건의 영향이 있는데,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당시 청와대 인근까지 북한 부대가 침투했고, 이 사실이 밝혀지자 한국 정부는 청와대 인근 경비를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악산 일대가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고, 여기에 숙정문도 포함되면서 오랜 기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게 됐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다 2006년 북악산 개방 계획에 따라 숙정문이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됐는데, 오랜 세월 동안 잊힌 흔적은 쉽게 되돌릴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북대문은 지리적, 역사적, 그리고 정치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겁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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